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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철기시대 마지막 야만인의 욕망

- 조각가 최태훈 미술세계 올해의 작가 수상 기념전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의 단상

정원진(여행작가, 시인)

구멍을 엿본 조각가가 있었다. 존재의 고통을 꾹꾹 집어삼키며 자신의 작품의 동력원으로 삼는 잔혹스러울 만큼 치열한 그에게 존재와 삶과 세계의 비의(秘意)을 엿보게 한 구멍이 있었다. 비록 온전한 원형의이 아니었어도, 수많은 틈새와 균열에 불과했어도 혹은 살아있음의 상처의 흔적이었다 해도 그건 분명 구멍이었다.

이 세계를 뚫고 들어오는 빛, 이 세계 너머 저 세계를 들여다보거나 닫힌 이 세계를 박차고 열린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을 꿈틀거리게 만드는 틈과 균열, 고독과 소외의 몸부림 속에서 소통과 화해로 넓어지고 깊어지는 시간과 공간의 틈바구니.

그러한 구멍을 그에게 열어준 건 한 그루 나무였다. 그 나무 아래에는 언제나 쓰러진 빈 소주병과 술잔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철 좋은 날이면 그리움처럼 꽃잎이 날렸다. 그렇게 술잔 위로 꽃잎이 흩날렸으니, 그 누군들 취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그곳에서 그는 운명처럼 구멍과 만났다.

아마도 바람이 불었으리라. 잎새가 바람을 따라 흔들렸을 것이고 그 사이로 황홀한 빛의 군무가 펼쳤을 것이다. 술에 취해 널브러져 꼼짝도 할 수 없는 그는 살아있음의 고통과 희열 속에서 보았으리라. 구멍을, 새로운 출구를. 존재의 격렬한 부정으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듯, 다른 존재 다른 세계와의 강렬한 조응으로 새로이 태어나듯. 구멍을 바라본 그는 이미 그가 아니었고, 그 앞에 놓인 세계는 그가 바라보던 세계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한발 더 나아간다. 존재와 세계의 경계를 나누고 구분 짓는 벽과 선을 두려움 없는 발걸음으로 넘어선다. 차갑고 단단하고 견고한 철에 벽에 선에 구멍을 뚫는 행위로. 분출할 길 없는 에너지로 가득 찬 그는 그가 보았던 그 구멍을 고스란히 작품으로 가져오기 시작한다. 그의 모든 정력을 쏟아낼 그리하여 결국에는 죽어갈, 그 죽음으로 새로운 생명과 작품으로 탄생시킬 하나의 구멍을.

조각가 최태훈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는 이미 몇 가지가 있다. 알려진 데로 그 중 하나나가 ‘철’이고, 철에다 작업하는 ‘플라즈마 기법’이고, 그 기법을 통해 변화된 철의 물성으로 드러나는 ‘빛’이다. 빛이라는 키워드와 비슷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것을 감히 구멍이라 부른다. ‘철’과 ‘플라즈마 기법’과 ‘빛’ 그 모두는 구멍이라는 단순하고 원초적인 본질에 기인하고 그것으로 수렴된다. 그러니까 철과 플라즈마 기법이 구멍을 만들어내는 수단이라면, 빛은 그 구멍을 통해 드러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그 수단과 현상 너머에 존재하는 목적과 본질은 무의식적이고 원초적인 구멍에 있음이 분명하다.

구멍이라는 키워드로 조각가 최태훈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매우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가 만들어내는 구멍은 언제나 새로운 구멍이기에. 그것은 늘 같은 구멍이지만 언제나 다른 구멍이기 때문에.

이러한 구멍으로 작품과 작가의식의 변화를 짚어보면 몇 가지 단계로 나뉜다. 우선 초기작 ‘존재의 고통으로부터 널 자유롭게 하라’에서 벚나무 아래에서의 우연성으로 만나게 되는 원형적 구멍까지의 시기가 있다. 이 시기는 그가 왜 철이라는 거친 소재를 다루는지, 학대와 고문 수준에 가까운 가학과 피학으로 점철되는 고난의 과정을 두려움 없이 맞서는지 알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기간이다.

그 다음이 구멍을 통해 엿보기 시작하는 단계다. 이 시기는 구멍으로 드러나는 빛의 현상에 초점을 맞추는 시기이며, 그 구멍으로 생명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시기이기도 한다. 별빛의 형상을 빚어낸 코스모스라는 우주가 그렇고, 생사의 고비를 넘나든 교통사고 이후의 생명과 자연에 대한 주제에 경외감을 가지고 천착하는 것이 그렇다.

 

그 다음 단계가 구멍을 통해 사물과 현상과 사건을 해체하고 새롭게 조합하는 시기. 빛에 가려지고 빛이 비치지 않는 부분에 구멍을 내고 새롭게 빛을 주어, 마치 안과 밖을 뒤집어 전도시켜 사물과 현상과 사건의 이면성을 드러내고, 관습적으로 내재화된 상식적 의미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노력과 시도로 읽어낼 수 있는 기간이다. 이는 작가 내부의 무의식적 욕망이나 트라우마를 가감 없이 쏟아내고자 하는 시도로도 볼 수 있다. 전시 ‘조각으로 드라마를 쓰다, invisible man'에서 그러한 노력을 자연스럽게 엿볼 수 있다. 초기작에서 보여 지는 존재의 격렬한 고통이 부드러운 표현으로 승화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철이라는 소재적 특성으로 인해 효과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표현할 수 없다는 한계점에 다다른 듯 보인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구멍’이라는 ‘비워냄’ 또는 ‘빔’과 조각과 형상이라는 ‘채움’과 ‘드러냄’이 갖는 모순에 기인할 것이다. 어쩌면 그 한계점은 그가 밟아야 할 당연한 수순이고 그가 만날 수밖에 없는 필연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는 ‘구멍의 바닥’을 손으로 짚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구멍의 바닥에서 멈춰 선다면 그는 내가 알고 있는 조각가 최태훈이 아니다.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를 보며, 이 전시가 구멍의 한계를 경험한 그가 앞으로 어떻게 변모하게 될지를 조심스럽게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기점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포인트를 섣부르게 ‘구멍에서의 탈출’이 아닐까 하고 예단했다. ‘구멍에서의 탈출’이란 구멍을 발견하고 그 구멍을 통해 들여다보고 엿보고 해석하는 이전의 행위, 그러니까 구멍 안쪽에서 구멍 밖으로 이행을 의미한다. 어쩌면 그는 구멍을 통한 표현이 아니라 구멍 자체에 주목하면서 더 많은 형상과 표현을 잃어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들이 비워냄을 통한 새로운 ‘채움’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짐직해본다. 이러한 예단이 가능했던 것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여성성이라는 주제의식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주제의식을 빚어내는 구멍 형상의 변화다.

 

결국 그는 자궁이라는 여성성으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간 구멍은 작고 미세한 구멍들이 모여 보다 온전한 형태의 하나의 원으로 환원되었다. 그 구멍은 크고 넓고 깊어졌으며, 순수하고 원초적인 여성성과 같은 텅 빈 공허로 태어났다. ‘invisible man’이 구멍으로 인한 죽음에 관한 제의였다면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는 구멍이라는 자궁과 여성성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탄생에 관한 이야기이다.

조각가 최태훈, 그는 현대문명이라는 이 철기시대의 마지막 야만인이다. 차갑기 그지없는 남근과 남성성의 상징인 철로 이루어진 이 고단한 문명에 맞서 바람이 불어오고 불어갈 수 있는 구멍을, 자궁을, 여성성을 만들고, 땅을 기고 하늘을 나는 모든 생명들의 숨구멍을 내는 조각가다. 아마도 철기문명의 종언은 이러한 작은 구멍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빔, 죽음, 공허, 허공 같은 우리들 주위에 널려있는, 무한으로 열려있는 그 구멍에서.

과연 그는 구멍을 빠져나올 수 있을까? 조형, 조각, 몸이라는 차마 버릴 수 없는 육체성을 온전히 간직한 채 그 구멍을 빠져나올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가 구멍을 빠져나왔다고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는 아직 구멍 이편에서 저편을 엿보고 있을 수도 있고, 이쪽도 저쪽도 아닌 구멍 안에 갇혀, 몸이 끼인 채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을 수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산고(産苦) 중이라는 것이다.

끝으로 미술과 조각에 아무런 전문적 식견과 소양도 없는 이가 이렇게 글을 쓰는, 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힌다. 그 날 햇살은 눈부셨고, 꽃이 피었고,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술잔 위로 꽃잎이 떨어졌다. 생각해보면 모든 게 다 그 구멍 때문이다. 아낌없이 주고 떠나간 이가 남긴 추억처럼 이제는 잡풀 속의 그루터기로 남은 그 나무에게 고개 숙여 술잔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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