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운(소설가) / 예술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들


이천시 마장면 장암리에 얽힌 내력

  나는 원로 조각가 강대철 선생님과 젊은 조각가 최태훈씨가 가깝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친하게 지내고 있다. 내가 그 두 사람을 안 것은 소설가 이문열 선생님을 통해서였다.


  조각가 최태훈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앞의 두 분을 조금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순서인 듯 하다. 그래야 최태훈을 얘기하는데 그럴 듯한 분위기가 잡히는 까닭이다.


  1985년 늦가을 나는 평소 존경하던 이문열 선생님에게서 집중적으로 문학 지도를 받고자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경기도 이천으로 내려갔다. 나이 서른이었고 결혼 전이었지만 이번이 아니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다는 조바심에 시달리다 내린 최종적인 결정이었다.


  이문열 선생님은 당시 하루에 버스가 세 번 드나드는 오지인 마장면 장암리의 한 농가를 빌려 집필에 몰두하고 계셨다. 나는 선생님의 허락을 얻어 그 윗방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기약 없는 등용문을 향한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이문열 선생님께서는 본래 대구가 등지셨는데 상경한지 1년도 되지 않아 도시에 질리셨다며 집필할 곳을 찾다가 이천으로 오셨다. 그분의 이천 행을 추천한 분이 바로 조각가 강대철 선생님이셨다. 강선생님은 이천이 고향이었지만 게 중 오지인 장암리에 등지를 틀고 계셨다. 그분의 집은 방이 두 개에 커다란 창고 같은 작업실이 하나 있었다. 그 작업실에서 나는 조각가를 만났고 조각 작품을 만났다. 아니 만났다고 그냥 말할 것이 아니라 작품이 탄생하는 전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전문 용어가 무엇이 됐든 나는 작업 과정을 진흙과 석고 작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완성된 작품을 그냥 조각이라고 불렀다.


  문학이 아닌 다른 예술의 작가가 생활하고 작업하고 고뇌하는 모습은 내가 문학을 공부하는데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아하, 예술의 탄생은 이렇듯 고통이 다르는구나 하며 거듭되는 신춘문예 참패에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참으로 신비롭고 눈부신 과정을 거쳐 조각 작품이 탄생할라 치면 나는 마치 내가 작품을 만들기라도 한 양 기뻐하고는 했다.
 



동산집과 담뱃집

  강태철 선생님과 이문열 선생님은 한 살 차이로 친구 같은 분위기로 살아갔지만 결코 말을 놓지는 않고 서로의 권역을 존중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두 분 다 두주불사여서 마셨다 하면 밤을 거의 새었고 때론 2박 3일을 마신 적도 있었다. 주로 연일 마실 때는 멀리 있는 작가들이 찾아왔을 때였다. 객들 중에는 소설가, 시인, 화가, 조각가, 도예가 등이 고루 섞여 있었다. 어떤 때는 그림이나 조각을 배우는 아리따운 여대생들이 서른 명도 넘게 찾아와 내 가슴을 온통 휘저어 놓고는 했다.


  나는 이문열 선생님에게서 글을 배우는 것처럼 자연스레 술을 마시는 것도 배웠다. 그것도 예절을 지키며, 혹은 맛을 음미하며 조용히 마시는 것이 아니라 통음의 거친 술버릇이었다. 그 버릇은 2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앞에 앉은 사람과 대화를 하기 위해 취해가는 과정도 똑같다. 그리고는 이튿날 꼼짝도 못하고 누워서 탈난 속을 달래는 것도 같다.


  두 분의 술버릇은 거의 비슷해서 억수로 퍼마신 이튿날이면 양쪽 집은 인기척이 없을 정도였다. 그냥 시체처럼 누워 계속하여 자는, 즉 반수 상태가 종일 이어지는 것이다. 두 분 다 작업을 위해 가족과 떨어져 있었으니 누가 해장국을 끓여 억지로 권하지도 않았다. 처음에 나는 두 분을 위해 파를 숭숭 썰어 넣고 어설픈 된장국을 끓여 대접하려 했으나 두 분은 들은 척도 않고 손을 내저었다.


  “못 먹는다 .너나 먹을 수 있으면 먹고 힘내라.”
  몇 번 그런 일이 있다 보니 나도 어느새 통음을 하고는 이튿날 계속 자는 버릇이 들고 말았다.


  강 선생님이 있는 집은 동산 위에 자리했다고 하여 동산집으로 불렸고, 이선생님이 계신 집은 예전에 살던 사람이 담배가게를 했었다고 하여 담뱃집으로 불렸다. 그 두 집은 약 7백 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어지나 교감이 잘 통하는지 마치 텔레파시가 실제로 오고 가는 것처럼 두 분은 서로의 마음을 읽어 냈다.

 

예를 들면 어느 한 분이 슬며시 찾아와서는 “오늘 한 잔 하자고요? 내 귀에 그렇게 들리던데.” 하면, 한쪽에서는


“아, 내가 그랬지요. 오늘 무슨 날인지 아세요. 바로 화요일이에요, 화요일.” 이런 식이었다.


  나는 그 양쪽 집을 오가면서 술을 배우고 예술가의 멋을 배웠으며 작가의 자존심과 자잘한 인정 따위를 배웠다. 어느 해 겨울눈이 허리까지 내린 적이 있었다. 그 눈을 헤치고 술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조우하던 멋이란.


나무를 용접하는 사나이

  그렇게 86년이 가고 87년이 왔다. 그 해 봄 이문열 선생님께서는 그 곳에 아예 집필실을 지으셨다. 그래서 그 해 가을 지금의 무악문원 서재 자리에 서른 평 남짓한 집이 지어졌다. 나는 그 새 집으로 책을 옮기고 이사를 했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 새 집이 바로 조각가 강대철 선생님의 동산집 옆집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동산집의 작업실로 나는 가게 됐고 어느 날은 아예 종일을 작업실에 눌러 앉아 세끼를 얻어 먹어 가며 작품이 익어 가는 모습을 온전히 지켜 보기도 했다.


  1988년이 소리 없이 우리를 찾아 왔다. 나는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의 말석에 이름을 올렸고 결혼하여 서울로 나왔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갔다. 그래서 이제는 그저 까마득히 아름답고 포근한 추억으로 동산집이 내 정신과 몸에 자리 잡을 즈음 문득, 정말 문득 나는 최태훈이라는 조각가를 동산집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동안 이문열 선생님은 평소 꿈꾸어오시던 젊은 후배들을 위한 부악문원(설봉산의 원래 이름이 부악이라고 하여 문원의 이름이 됨)을 1996년에 준공하셨다. 그리고 젊은 작가 지망생들을 모집해 무료 숙식과 함께 자신의 열정과 앎을 전해주셨다. 내 문학의 뿌리도 이천과 이문열 선생님과 연관이 있기에 자주 무악문원을 들락거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술 몇 잔이 들어가 얼큰한 기분에 옛 추억에 젖어 이곳저곳 부악문원을 구석구석을 더듬다가, 옆의 동산집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불쑥 전기 용접의 창백한 색깔이 내 눈을 향해 날아들었다.


  기름때가 꼬질꼬질 오른 작업복에 긴 머리를 뒤로 꽁지머리를 한 젊은 조각가가 흙을 털고 말린 커달나 나무 뿌리에 대고 전기 용접을 하고 있었다. 마른 나무 뿌리에 전기용접이라니? 순간적으로 나는 내가 아는 상식을 뒤집은 그를 쳐다보았다. 눈이 큼직하고 얼굴이 흰 젊은 작가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무에 전기 용접을 하다니 그게 됩니까?”


  “보시지 않았습니까. 되니까 하는 거죠.”


  순서가 바뀌었지만 나는 동산집의 옛 주인인 강대철 선생님은 그 곳에서 몇 백 미터 안쪽으로 새 집을 지어 이사를 가고 한 젊은 조각가가 동산집을 차지해 살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었다. 그러나 서로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잠시 그가 작업을 하는 광경을 보다가 문원으로 돌아왔다. 더 있고 싶었지만 작업이 전기 용접이라 눈이 부시고 아파 더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사를 나누지 못하고 그곳을 떠났다.


  “최작가, 어~이 최작가”
  문원으로 돌아온 나는 이문열 선생님께 물었다.


  “동산집에서 젊은 조각가를 봤는데 바싹 마른 나무 뿌리에 전기 용접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 서로 인사를 한 모양이구나. 최태훈이라고 아주 참한 조각가지. 이따가라도 오게 하여 인사를 시켜 주지.”


  최태훈. 그때부터 그의 이름은 내 가슴에 새겨졌다. 나무에 전기 용접을 하는 사람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그날 술자리는 더 깊어졌고 결국 그와 난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만난 최태훈씨를 그 후로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원에 무슨 일이 있어 갈 때마다 그는 문원에 있었고 없을 때는 내가 그의 작업장을 둘러봤으니까.


  “작품이 좋습니다.”
  그럼 그는 무뚝뚝한 얼굴에 약간은 미소를 띄고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조각을 잘 아시나보죠?”


  그럼 나는 손으로 손사레를 치면서 적극 아니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음흉하게 웃었다. 그럼, 나 정도는 굉장히 수준 높은 관객으로 봐야 할 것이다. 초벌 작업서부터 석고 작업이며 브론즈로 작업이 마무리되는 걸 본 게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보다 강대철 선생의 어떤 작품은 디테일을 할 때 옆에서 거든 적도 있었다.


  “솔직히 작품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강 선생님 덕에 조금 높은 안목을 갖게 됐습니다. 그런데 최작가의 작품은 지금껏 내가 본 그 어떤 작품보다 얘기가 꽉 차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뭐랄까, 그냥 평하라면 전문 용어를 모르니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흔한 작품은 아니다. 얘기가 꽉 차 잇다.”


  “이쁘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그와 만난 첫해가 저물어 갔다.


  다음 해 정초였다. 새로 들어온 문원생들과 문원을 짓기 전 사적으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거쳐 간 젊은 작가들이 함께 모여 술자리를 벌이는데 그가 나타났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 모두가 문학을 하는 사람이고 그는 조각가였음에도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후에도 또 그 후의 술자리에서도 마차가지였다. 문원생들은 아예 형처럼 기대며 대놓고 술을 얻어 먹는다고 했다.


  선생님도 그가 있는 것이 거슬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자 자연히 그와 우리는 모두가 깊이 친해졌다. 나이가 그 보다 몇 살 위인 내가 자연히 형이 되고 그가 아우가 되었다. 그러나 술이 깨면 그를 아우로 대하기가 조금 미안했다. 그것은 우리 예술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체면이랄까, 양심이랄까 그가 너무도 좋은 작품을 생산하기 때문이었다. 내 눈에 l비친 그의 작품은 최상이었다. 조금만 만만하게 작업을 했어도 나는 그를 문원생 부려먹듯이 막 대했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늘 주눅이 들 저도로 그의 작품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술이 취한 상태에서는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자리에서는 그의 이름을 부르기보다는 최작가로 부르게 됐던 것이다.


부악문원의 술 동지

  그의 두 번째 작품전인 우주 테마가 있고 얼마 되지 않은 2000년 8월 상당히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문원에 갔을 때였는데 그는 보이지 않았고 그의 작업실도 닫혀 있었다. 무슨 볼일이 있으려니 했는데 문원생 중 한 명이 그의 교통사고 소식을 전했다. 그것도 경상이 아니라 죽음과 삶의 경계를 오르내리는 중상이라는 것이었다.


  힘든 투병 끝에 퇴원한 그가 작업실에 다시 나타났을때는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한 능력 있느 젊은 작가의 성공을 하늘이 이토록 시샘을 한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초췌해 있었고 허약해 보였다. 체육을 전공하는 젊은이 같이 탄탄하던 그의 몸은 지팡이에 의존해야지만 겨우 걸을 수 있었다. 그런 몸으로도 그는 쉬지 않고 불꽃을 튀기며 작업에 몰두했다 .그리고 식물 시리즈가 탄생했다.


  다시 얘기하지만 나는 조각 작품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냥 나름대로 내 성향에 맞는 것을 선별할 정도이다. 문외한에서 한 뼘 정도 앞으로 나왔다고나 할까.


  식물 시리즈는 두 번째 개인전 때 보여준 우주라는 거대함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과연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사람답게, 작고 하찮게 여겨지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결코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메시지가 강하게 담겨 있었다. 사고를 당하기 전에는 그도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그런 것들을 하찮게 여겼을 것이리라. 그러다가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눈이 달라졌던 것이리라. 어지간히 궁금했음에도 최태훈 씨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이미 나에게 풍요로운 신뢰를 얻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2년이 흘렀다. 올해는 유독 이천엘 자주 갔었기에 그만큼 그와 술을 마시는 시간도 그의 작업장을 찾은 시간도 많았다. 그런데 내눈에 그의 작품이 또 변해 있었다. 동선으로 조각한 작은 나무들이 무수히 모여 이룬 숲들 시리즈가 그랬다. 허풍이 아니라 나는 그 청동 숲을 보면서 실지로 폐가 시원해지며 깨끗해지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이번에도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4월 어느 날 그가 득남을 했다며 토종 순대와 막걸리를 사들고 문원으로 올라왔을 때 나는 그곳에 있었다. 그를 축하해 주면서 대낮이었지만 나는 많이 취하기로 작정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다른 지인이 아닌, 우리 부악문원의 진정하고 영원한 예술가며 술 동지인 때문이었다.


  술을 마시는데 생각이 하나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것은 소중한 생명이 그에게서 태어났으니 이제 그의 작품은 또 변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눈을 보면서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