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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로 이루어진 식물성 - 오브제나 행위로 바뀌는 몸 / 박영택



  철판덩어리를 일정한 면으로 잘라낸 후 프라즈마라는 도구를 사용해 오랜 시간 갈아대고 긁어서 생긴 흔적이 철의 피부, 표면에 독특한 질감과 형상을 떠올려준다. 작가는 그렇게 철판을 기묘한 이미지가 서식하는 장, 화면으로 만들어 놓았다. 견고한 철의 피부는 수많은 상처를 입고 너덜거리거나 혹은 자잘한 구멍을 만들어냈다. 난폭하고 무참하게 상처 입은 이 철의 앞면은 마치 견고한 갑각류의 등판이나 혹은 고목의 나뭇등걸 내지는 오래된 바위의 주름을 닮았다.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 상처와 주름들이 재미난 형상과 여러 흔적, 이미지를 부추겨 주고 있다. 공간 속에 부정할 수 없는 물질로 존재하는 조각이라기 보다는 평면추상화의 표면을 공들여 들여다보고 있는, 그런 시각적 체험을 맛보고 있다.

  무엇보다도 철의 물성을 가능한 한 최소화 시키면서 이질적인 재질 감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것은 철이란 물질을 은연중 해체하는 방식이다. 깎고 다듬고 잘라내는 조각의 기존 방법론이 지워진 상황에서 이 작업은 오로지 표면에 도구를 이용해 선을 긋듯이 행위를 남긴다. 그 행위, 선들은 철의 질감과 물질성을 무화 시킨다. 그것은 어떤 것도 읽을 수 없게 만드는 행위이다. 해서 재료를 새로운 형태로 변모 시키거나 재료가 주는 물성을 넘어서는 표현을 통해 새로운 물성이나 의미로 도약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사물이 가진 물성을 다른 사물로 전이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가 철판의 면에 도구를 이용해 무한정 갈아대고 긁고 흠을 내는 행위는 마치 철의 피부에 드로잉을 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니까 철판에다 그림을 그리는데 그 행위는 순수한 무작위적 행위, 반복과 집적 속에서 의미를 지니는 행위, 다른 어떤 것을 재현하거나 드러내거나 이미지화 시키기보다는 그저 그 표면과 자신의 몸이 만나 만들어놓는 신체의 순수한 행위성과 호흡의 교차 같은 것들로 이루어질 뿐이다.

  흔적을 내고 다시 지우고 또 다른 흔적을 내고 또 덮어나가는 그런 과정들이 이루어지고 종국에는 얇아져서 구멍이 조금씩 뚫리는 판,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판을 만난다. 그 이면에 빛/인공의 조명이 투사되면서 주변공간을 은은하게 빛으로 적시면서 공간과 사물이 일체화되는 미묘한 체험 역시 고조시킨다. 그로 인해 그것은 자연스레 설치화 되는 편이다.


  결국 작가는 프라즈마라는 도구를 가지고 한 사물을 다른 사물로 변이시키는, 일종의 연금술을 보여준다. 순수한 드로잉 행위가 축적되면서 철판이 찢겨지고 그것은 단순히 새로운 사물로 변화되는 것 이전에 어떤 정신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를 통해 우리는 아직 존재해본 적이 없는 그런 새로운 철, 철의 또 다른 면모를 만난다. 그것은 철이자 철이 아니고 물성이자 물성에서 벗어나 있고 조각이자 조각을 벗어나 부조나 회화처럼 우리들의 시선 앞에 직립해있다.

  덩어리와 질량이 감소되면서 철은 얇은 면이 되어 수직으로 서있거나 세워져 있거나 벽에 걸린다. 비교적 중력의 법칙에서 자유로워진 철이 허공 속에서 유영하듯이, 부유하듯이 유기적으로 자라난다. 엄청난 시간과 노동으로 단련된 그 철판이 종잇장처럼 꾸겨져 있거나 찢어댄 것 마냥 휘어져 있다. 허공 속에 느닷없이 파열음을 내며 금속성의 한 자락들이 풍경처럼 펼쳐져 있다. 그것들은 일종의 식물이미지, 자연의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형상을 암시한다. 최태훈은 철과 동, 돌이란 소재를 이용해 자연에서 받은 인상을 압축해서 일종의 풍경처럼 형상화시켰다. 반면에 돌, 동, 철을 유기적 덩어리로 연결 지어 세워둔 몇몇 작품들에서는 기존 조각의 관습을 장식적으로 따른 혐의가 있고 그 형상이 다소 제약돼있다는 아쉬움을 준다.

  식물성의 기. 나무 아래서 나뭇잎 사이로 환하게 쏟아져 내리는 햇살, 혹은 잎사귀에 뚫린 자잘한 구멍들 틈으로 빠져 나와 빛나는 빛들의 매혹적인 산란에 감격한 인상을 떠올리며 만들어나간 이 작업은 결국 나무와 잎이란 식물에서 받은 인상을 형상화 한 것이다. 차가운 금속성과 견고한 물질들이 유연하고 유기적이며 분열적인 식물의 우아한 형태를 추적해나가듯이 그려 놓은 것이다. 나로서는 이렇게 자연에서 받은 감흥, 인상의 한 장면을 단단하고 무겁고 날카로운 철을 통해 이미지화 시키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부드럽고 유연하고 말랑말랑한 자연에서 가장 먼, 생명체와 가장 차갑게 떨어져 있는 철이란 물질덩어리를 무수한 시간 동안 공을 들여 갈고 상처를 내서 판판한 평면으로 만들고 휘고 구부려 뜨려 철 본래의 물성을 변형시켜 식물을 만든 것이다. 기묘한 공격성과 함께 재료 자체를 이질적인 존재로 변화시키는 연금술적인 힘으로 인해 철은 식물성 기를 뿜어내고 있다. 식물서의 세계에 대한 이런 인식과 천착은 서구를 통해 이식한 조각세계가 동양의 자연주의와 만나는 근거를 조심스레 마련해 줄 것이다.

  자연과 생명의 형성과 성장에 대한 일종의 경외감을 보여주는 이번 작업들은 작가의 자연관, 자신의 주변 삶에서 관찰되는 식물성의 세계에 대한 천착 속에서 가능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 점에서 근작들은 이전 작업의 다소 관념적인 주제의식에 비해 견고한 지점을 마련해나가는 시도로 보여진다. 아울러 자신만의 독자적인 철과 동을 다루고 형성해내는 기량과 노동의 두터움은 그런 미덕을 더욱 강하게 다져주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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