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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 고속정보사회에서의 조각의 논리

 

광주비엔날레 전시팀장 이원일

1. 오늘의 시점에서 조각가가 ‘조각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은 이미 고리타분한 질문이 되었다. 현대미술이 당대의 삶과 문화조건을 탄력적으로 제기하고 감당해오면서도 그 질문의 절박함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 질문이 아직도 유효한 이유는 아마도 그것이 결국은 구태의연한 우문이 되기 일쑤라는 사실일 것이다. 비트의 속도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그러한 질문은 종종 우울과 피곤을 동반한다. 이번 전시에서 최태훈의 조각작품은 결국 숨길 수 없는 현대미술의 우울하고 피곤한 현 주소위에 다시한번 던지는 ‘조각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최근의 설치미술과 테크놀러지 미술의 확산 추세속에 조각과 사물, 조각과 건축, 조각과 평면, 조각과 풍경사이의 경계가 흐트러지면서, 전통적인 조각의 실재론적인 타당성과 현대조각의 혼란스러운 명목론 사이에서 최태훈은 나름대로의 방향타를 부여잡기 위해 시간-공간의 묶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추구하고자 한다. 과거의 작업에서 인간문명을 한계상황으로 인식하면서 인간의 실존적 조건을 비판적으로 조망하는 인체 작업에 전착했다면, 일체의 표현성을 소거시키고 철의 물성과 단순한 조형성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탐구하려는 이번 전시작들은 그 자신의 삶자체에 대한 의식의 변화를 반증한다.


  그것은 처절한 불안과 고독, 두려움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면서 체득한 젊은날의 고뇌를, 그 출구없는 고독을 그 자신에게 되돌려주면서 이제 그가 사물과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그의 주위에서 일어났던 온갖 불합리와 부조리, 고통속에서 알 수 없는 분열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토해냈던 사르트르류의 ‘구토’의 메스꺼움과 결별하면서 이제는 그것들을 폭로하기보다는 삶에 대한 소망을 드러내려는 변신에 다름아닌 것이다.
  그렇게 그는 사물과 세계의 본질에 닿기 위해 ‘머리’를 절단해버리고 ‘팔’을 절단해버리기도 했고 용접기의 진동끝으로 전해오는 존재와 허무사이에서 끊임없는 시각의 분열상태를 경험한 끝에 마침내 ‘전부’를 제거해버린 순수한 절대고독의 상징 그 자체와 조우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그가 삶의 회의에 빠지면서도, 내장의 뒤틀림을 경험하면서도 끝까지 놓치지 않았던 ‘만들기’라는 전통적 행위의 진화의 결과요 피나는 노동에의 사랑을 묘사하는 방법론의 승리였다. 그것이 필자가 최태훈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뜰에 널려진 신작들을 보면서 느낀 소감이었다. 그리고 고철더미와 씨름하면서 반복되는 수작업에 의해 탄생한 신작들과 상처투성이의 그의 손을 필자는 ‘고귀한 야만’이라 불렀다. 뒤샹이 집어던진 후 미술에서 포기했던 ‘만들기’의 복원을 꿈꾸는 ‘야만’말이다.


2.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7개의 철 조각작품들은 이렇게 그가 체험한 삶에 대한 비전과 의식의 변화와 긴밀하게 연관되면서 조각의 존재방식과 본질적 속성, 그리고 시간과 공간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그것은 유클리트 기하학에서 위상기하학으로, 뉴톤물리학에서 상대성이론으로의 이행같은 시공간의 대대적인 의미의 변환에 대한 작가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반성적 성찰에 의해 이루어진 이번 신작들은 과거의 인체작업들에서 보 수 없었던 설치방식과 조명, 빛과 그림자, 그리고 단순하면서도 유연한 철의 질감에 의한 내밀한 운동감을 표출하며 전시공간 안에서 환원과 확산을 반복한다. 즉, 입방체이기도 하고 평면의 틀이기도 한 조형물들이 전시장 공간으로 확산되어 나가는 것을 허락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결정적으로 구속하기도 한다. 이것은 하나로 연결된 전체속에 상호 이질적인 두 세계, 즉 정형과 일탈, 해방과 구속, 환원과 확산, 진행과 중단 등의 공존을 의미한다. 그렇게 전시물들은 역학적인 균형과 그 끝없는 긴장의 형식을, 뒤틀림과 자기 진화의 자유주의를 재현해낸다. 그리하여 관람객들이 거대한 물줄기처럼 둥글게 순환하는 구형철판과, 물의 파장이나 나뭇잎을 연상시키는 자연형태의 구조물들 속으로 걸어들어가면서 철구조물들이 정지된 공간을 박차고 확장된 시공간의 중층적인 ‘켜’를 드러냄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시공간의 중첩이란 유물론적 입장에서 조각의 시공간적 개념에 근거한, 만들어지는 동안의 재료의 진화방식과 물질경험, 철이라는 무기질에서 일어난ㄴ 침전방식 그리고 전시공간에서의 관람객의 물리적 개입까지를 수용하는 시간, 공간의 개념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질이라는 조건을 전체의 하나로 아우르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그렇게 볼 때 최태훈의 조각은 실리주의적 목적에서 생산된 철이라는 재료에 미적행위를 가하여 그가 관찰한 물리적 세계를 정신적 영역으로 치환시키고자하는 탐구에 다름아니다. 즉 육중함, 강함, 경직됨 등 ‘철’이 갖는 물성과 속성을 넘어 그것을 매개로 하는 사회의 권력구조, 경제로부터 철의 정신을 일탈시키고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바로 그점이 이번 전시에서 최태훈의 작품과 철이라는 재료에 대한 태도를 반영한다. 조형의 주체로서 자신의 의지를 적극적이고 일방적으로 재료속에 관철시키는 대신에 그는 철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물리적 변형과 함께 때로는 거칠고 가공되지 않은 물질의 극한적 상황까지도 있는 그대로 노출시키고 용접에 의한 산화과정의 발색 또한 그대로 존치시킴으로써 가장 자연스러운 과정을 통해 ‘생성과 소멸’, ‘혼돈과 질서’ 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또한 구멍이 반복해서 뚫린 망상구조와 무수한 시간의 흔적들은 의식과 무의식의 변형이라는 심리적 상황을 내밀하게 들어내기도 한다. 마치 신비스러운 비밀을 탐사하는 인간노력의 알레고리, 모든 종류의 욕망의 알레고리로서의 심리를 분비물처럼 쏟아내듯이 말이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들은 총체적인 변증법(동적/정적, 시각/촉각, 자연/인공, 유기체/무기물, 진화/미발달, 문명적 형태/자연형태 등)을 전시공간에서 성장시킨다.


3. 또 다른 측면에서 이번 전시작품들이 과거 작업과의 결별을 보여주는 지침은 3차원속의 평면성, 회화적 구성이다.
거대한 원형의 형상과 병풍모양의 변형구조물들은 단호한 모뉴먼트처럼 보여지기 보다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내부와 외부를 관통하게하는 공간해석적 구조물로 분석된다. 그것들은 전시장 바닥과 벽면들과 상호 연결되면서 다시 거시적 공간을 형성하게 되는데 공간을 분할하고 설치적 형식으로 점유하기 위한 유용한 방법으로 선택된 병풍식 평면으로 보인다. 특히 문처럼 변형되고 구멍이 뚫린 유기적 구조물은 표면에 가해진 패턴무늬와 미세한 색체의 변화에 의해 시정이 넘치는 회화적 공간을 연출한다. 그것은 작품전체를 감싸고 도는 생명감과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시적분위기를 자아내기조차한다. 이러한 변화는 이전의 덩어리와 볼륨, 변형작업으로부터 자연과 생명의 형성과 성장에 대한 경외로 전이된 최태훈의 변모된 의식과 사색의 깊이를 엿볼 수 잇는 부분이다. 그래서 그것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의 삶과 작업실 환경, 그리고 문학동네 이웃들의 사유의 틀을 반영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인간의 조건과 생명의 순환체계를 되돌아 보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작가의 사유가 도달할 수 있는 생명의 신비에 대한 암시로 가득찬 영역이자 빛과 그림자라는 시간의 흔적을 흡입하여 인간과 사회의 삶과 역사,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망하는 명상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4. 최태훈의 나이로 보나 조각이라는 작업의 경륜으로 보나 아직 인간과 자연이라는 세계를 한 획으로 결정할 만한 경지는 분명히 아닐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작업들과는 커다란 변별점을 보여주는 이번 전시작품들에서 ‘형상’을 없애는 작업을 통해 세계와 인간을 관류해 온 시간과 공간을 탐구하려는 의지는 결연해보인다. 그것은 자연친화적인 순수하고 맑은 세계로의 지향이요, 인간과 자연의 합일, 음과 양의 조화의 세계를 추구하기 위하여 불필요한 대상들을 과감하게 제거해 나가면서 최소한의 형태만을 추출해내는 작업이다. 그런점에서 그의 작품은 이제 모종의 동양적 정신주의로 진입된 단계를 보여준다. 즉, 문인화에서 느껴지는 형태의 단순성이 세계에 대한 작가의 정신성을 표출하듯이 최태훈의 작업은 정신성에 충만한 심상의 이미지를 소박하게 담아내고 있다. 물론 그 동양적 정신주의란 것이 작품의 형식과 내용으로 치열하게 천착되지 않는 한 대안없는 현실도피의 혐의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은 최태훈이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그가 향후 작업을 통해 제시해야 할 세계는 서구적 사조의 범람속에서 정적인 동양의 정신과 순수함, 조형언어의 본질, 존재의 원형을 부여잡으면서 존재하는 허상들을 제거하고 세계와 대상의 실체에 접근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명상의 세계일 것이다. 그렇게 그의 작품이 세계를 만들고 그것에 특별한 중요성을 기여하는 중개인으로서의 미술가의 힘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기대와 희망의 근거는 최태훈이 속도의 시대에서 여전히 ‘느림의 미학’을 신뢰하고 시간의 화살을 붙들 수 있는 여유를 잃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그가 아직 젊고 작품이 진행형이며, 여전히 ‘손맛’을 버리지 않고 있는 이시대의 ‘고귀한 야만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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