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알을 뿜어라 - 정형탁(덕원갤러리 큐레이터)


강철 시대의 아들들


  경기도 이천을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맹숭히 서이천 톨게이트를 통하는 것, 또 하나는 소설가 심상대가 말했듯 3번 국도에 ‘올라서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근대화된 노동이 만든 길을 따르는 것 외에 걸어서도 갈 수 있고, 달구지를 타고 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철기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이제 자동차나 지하철을 타고 그 곳을 간다. 우리가 실생활에서 전혀 의식하지 않을, ‘철로 만든’ 타이어를 매단 ‘철 자동차’를 타고 ‘철로 만든’ 톨게이트를 지나 ‘철로 구조화된’ 집들을 통해서 그 곳으로 간다. 그래, 어떤 철강 회사의 광고처럼 우린 여전히 철기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흔히 인류 역사를 도구를 만드는 재료에 의해 구분하곤 한다. 우리는 이를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라 이름한다. 이 분류의 습성에 따르자면 우린 지금 정확히 철기 시대를 살고 있다. 언제부터 철기 시대의 시작인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실생활 도구를 만든 재료들을 둘러보라. 모든 구조용 재료의 90% 이상이 철을 소재로 사용하고 있다. 신도시의 아파트들, 지금 창밖에 한참 지어지고 있는 오피스텔, 저 멀리 파리의 에펠탑,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지금은 무너지고 없는 뉴욕의 세계 무역 센터, 그리고 리노베이션을 마친 덕원갤러리도 내부 구조물 역시 철재다.

  철기 시대의 산물 속에서 생활하고 늘 철과 마주하는 우리는 이런 철골 조형물을 새삼스럽게 아름다운 미적 공간, 갤러리로 초대한다. 주위의 일상을 괄호하고 갤러리 공간에서 다시 철을 초대하니 철은 자신이 둘러싸인 공간에서 자신의 미적 몸매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다시 우린 아직 철기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아주 정확히 실증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헤파이스토스


  이 철기 시대에 경기도 이천, 마장면 장암리라는 작은 마을 설봉산 끝자락에 헤파이스토스-그리스의 헤파이스토스(로마명 불카누스, 영어명 불칸)는 제우스와 헤라 사이에서 난 대장장이 신. 올림푸스의 공예가로 알려져 있는 헤파이스토스는 태어날 때부터 아주 영리했지만 절름발이였다고 전해진다(작가 역시도 2000년도 여름 교통사고로 한 쪽 다리를 약간 전다). 그의 손에 의해 신들의 무기가 만들어졌으며(제우스의 번개 창 같은) 간혹 신들의 부탁으로 인간들(아킬레스 등)의 무기도 만들어 주었다.-의 후예가 산다. 이건 단순한 수사 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는 얘기다. 아버지, 철을 다듬어 문고리를 만들었고 아들, 불을 다듬어 숲과 우주를 만드니 대대로 집안은 불의 자식, 불을 통해 알을 잉태하고 불로 세상을 회태한 집안이다.

  헤파이스토스가 타의에 의해 올림푸스 산에서 추방당했다면, 최태훈은 스스로 서울이라는 공간을 아귀차게 버리고 이천이라는 외지를 택했다. 헤파이스토스가 때리고 구부려서 도구를 만들었다면, 최태훈은 자르고 불어서 작품을 생산한다. 그가 사용하는 프라즈마(Plasma)-압축된 공기로 고속, 고온의 제트성 기체를 만들어 철제 등을 절단하는 기계-기법은 단순히 철을 자르는 도구를 작품에 새롭게 적용한 것이다.

  최태훈은 프라즈마로 철을 ‘학살’한다. 깎이는 철은 불꽃과 함께 정처없이 사라진다. 철은 불이 되고 다시 불은 철과 함께 땅으로 돌아간다. 철이 빛을 만들고 그 빛은 형상을 만든다. 조물주가 흙을 빚듯 최태훈은 철로 형상을 만든다. 철이 불을 만들고 불은 철을 소멸시키는 이 절묘한 탄생과 소멸의 아이러니를 작가는 온전히 껴안는다.

  철로 만들어진 빛, 그 속에서 헐떡거리는 생명, 보는 이에게 철과 불은 거칠지만 작가에겐 여리디여린 민들레 홀씨처럼 온화하다. 헤파이스토스가 그랬듯.


깎일수록 덧붙여지는 철


  최태훈은 맑고 결곡한 눈을 가진 사내다. 스쳐 지나가는 이라면 새뜻이 미소짓는 그의 얼굴과 맑은 눈에 오직 따사로움만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 숭굴숭굴한 미소 너머엔 어제나 실체 모를 힘이 서려 있다. 이를 뭐라 불러야 할까. 분노 혹은 에너지라고 해야 할까. 이 분노를 현진건의 소설 『불』에서 순이가 지었던 그 싸한 미소가 지닌 희와 노가 교차하는 분노라면 과장일까. 자신에 대한 억압과 자신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표상해 주고 대신해주는 불이야말로 순이가 가졌을 애증일 터, 작가 최태훈에게 불은 찢고 찢기는 철과 함께 자신의 분노를 삭이거나 분출시키는 가장 좋은 매체가 아닌가 싶다.

  전공 이후부터 계속해서 그가 다룬 소재는 불이었다. 나무와 철을 접합시킨다든지, 두꺼운 철근을 용접하여 존재의 아픔을 표현해 낸 초기의 표현주의 작품에서부터 그는 불을 다루고 철을 어루만졌다.

  그의 작품 세계를 조망한다는 건 마치 산등성이에서 정상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어리석은 짓이다. 그의 작품은 조망 받을 것보다 촉망 받을 게 많아 보인다. 어찌되었건 그의 작품의 형식과 작품 경향을 개략하자면, 2000년 개인전 이전과 이후로 대별할 수 있다. 그 이전의 존재에 대한 고통과 소외를 표현한 표현주의적 작품군과 그 이후의 우주, 식물성, 탄생 등의 의미를 지니는, 주로 프라즈마와 많은 노동력으로 제작된 의미론적 작품군이다.

  갈라진 논바닥, 마른 잎, 씨앗 등의 이미지를 가진 작품들은 <팽창>, <껍질>, <알>, <씨앗> 등의 제목으로 제시된다. 분명 2000년을 기점으로 그에게 탄생 혹은 생명에 대한 작은 바람을 엿볼 수 있다. ‘과도한 노동에의 헌신’, ‘식물성’으로 평가받는 근작들에서 작가가 끈질기게 집착하는 건 다름아닌 생 혹은 삶이다.

  그토록 두들겨 맞고 깎인 철이 삶의 이미지로 태어나는 이 반어적 은유는 ‘때릴수록 강해지는 철’, ‘깎일수록(의미가) 덧붙여지는 철’의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겠다.



김광석, 그리고 조각가


  그가 타고 다니는 하얀 차에 유독 때가 많이 낀 테이프가 하나 있다. 요절한 가수 김광석의 라이브 곡을 모은 <김광석 다시 부르기 2집>이다.

  사실 그 테이프는 개인적으로 김광석의 아우라를 가장 진하고도 선명하게 지닌 명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김광석의 생생한 육성과 노래가 조동익의 편곡과 함게 개인적인 감상을 넘어 보편적인 아픔을 드러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산과 들이 온통 가을일 무렵 3번 국도를 타고 들을 만한, 내 20대 후반, 그러니까 30대를 향하는 무렵 남도의 국도를 친구와 함께 여행하면서 들었던, 30대를 지나 40대를 향하는 지금까지 내 차 안에도 싣고 다니는, 그 김광석을 작가 최태훈도 싣고 다닌다.
  
  불혹이 되면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통일된 북한을 지나 유럽으로 가는 꿈을 간직했던 맑은 웃음의 사내. 바람처럼 살다 풀잎처럼 쓰러져도 이름 모를 꿈 하나 묻을 뜨거운 가슴 하나 지켰던 가인. 이는 18세기 낭만주의자들이나 가졌던 곱다란 예술가들에 대한 허망의 이미지가 아니다. 최태훈이라는 작가가,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 짧은 생을 사는 한에서 최소한 가져야 할 영롱한 정신이다.

  불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불은 흥분이고, 불은 사랑이다. 때론 불은 세상에 대한 복수의 싸한 미소다.

  최태훈이  불을 대할 땐 거침이 없다. 철과 불은 그 앞에서 온순한 양이 된다. 손길 가는 대로 불이 탄생하고 철이 만들어진다. 쓰다듬을수록 불은 작가와 하나가 된다. 불이 의미를 탄생시키는 순간이다. 불은 철을 통해 의미를 탄생시키고 정처없이 사라진다.

  작가 최태훈이 이 소멸하는 불에 헤파이스토스의 테크닉에 김광석의 그 아픔까지 온전히 담는 날, 철은 영원을 성취하겠다. 그리고 그렇게 되길 바란다.

  끝으로 여기 작가에게 그리고 궁극으로 그의 작품에 대해 작은 졸시 하나 바친다.

난 조각가일 뿐

 

불아!

알을 품어라

죽음의 자유를 만끽하라

쉼없이 풀무하는

나는

씨발

조각가.

 

 

떨어져나간 쇳덩이

아무 연고 없는

언 땅 위에 떨어지는

죽음처럼 휘발되는

불, 똥

언 땅 녹이는 

불, 똥

 

 

잉태한 땅을 따라

새벽길 따라간 친구야

"그대 눈물 이제 강물"되어

산달을 입에 담고

가없이 새생명 담금질하는

여전히 난

조각가.

 

 

불을 품고

세상을 비추는

너의 살결을 고이 깍아

"시대의 새벽길" 여는

나는 씨발!

단지

조각가일 

뿐.